전라도 여행을 가보자 8도중에 명물중에 명물

전라도라는 이름의 어원은 고려 성종이 설치한 12그루의 나무 중 강남 전주목과 해양 나주목에서 따온 것으로, 전라도는 고려 시대 나주와 전주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수도권의 시작입니다. 전라도가 설립된 지 약 300년 만에 다른 광역시가 탄생한 셈이다. 참고로 이 지역은 당시 지정된 지방 행정 명칭 가운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유일한 지역입니다. 그러나, 영조 11년에 나주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정왕도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영조는 경상도 영남을 정복했다고 주장하면서 평영남 비석을 세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특정 마을에 역모(驛 mo)가 있으면 마을의 등급이 낮아지다가, 그 이름이 유래된 마을에 반역이 일어나자 도(道)의 명칭에서 삭제되었습니다. 위 글에서 보듯이 강원도는 원주에서 난을 일으켜 춘천을 거쳐 강춘도로 바뀌었고, 충청도는 인조 때 충청도(충주+홍주)에서 공홍도(공주+홍주)로 바뀌어 충청도로 돌아갔습니다. 어쨌든, 3년 후, 영조 14년에, 나주는 강원도와 함께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고대에는 군사령관급이었던 마한의 소국들이 이 지역에 만연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나라였던 목지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목지국의 영향력은 백제에 비해 상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마한동맹은 한강~임진강 유역, 안성천, 영산강 유역, 섬진강 유역 등 5개의 분수령이 있었지만 금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의 영향도 그리 강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섬진강 유역은 약했는데 너무 멀었어요. 목지국이 3세기 중후반 백제로 사라진 후, 백제는 목지국의 역할을 대신했지만, 백제는 목지국과는 사뭇 다른 고대 국가였습니다.

 

금강 유역은 적어도 4~5세기에는 유지되고 영산강 유역은 5세기까지 마한의 무덤과 함께 유지되고 있습니다.그러나 영산강 유역의 세력이 후기 마한연맹을 이끌지는 못했습니다. 포스트 마한 리그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면 다름 아닌 백제국입니다. 목지국이 멸망한 후 백제는 마한의 일원이 되었고 영산강 유역은 금강은 말할 것도 없고 전라남도 섬진강과 중동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작은 세력이었습니다. 마한이 백제에 편입된 것은 마한이 백제와 민족국가로서 투쟁한 과정이 아니라, 백제가 마한의 나머지 연합을 중앙집권체제로 편입한 것입니다.

물론 근초고왕이 설 49년을 기준으로 이병도가 주장한 전라도 남해안 마한(馬漢)을 평정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이론이었습니다. 일본, 백제, 신라, 가야를 정복한 기록이 있지만, 마한의 작은 왕국, 가야의 작은 왕국으로 여겨지는 마한 전체를 정복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 역사의 49번째 시대를 고대 역사 해석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근초고왕의 고고학적 위상이 있고 백제가 대방군(지금의 황해도)을 장악하고 난 뒤에 백제가 전라남도 서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신암강 유역을 차지하지 않았더라도, 이 이론은 49년 새해 이병도만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2000년대 후반 충청남도 역사문화원이 발간한 웅진백제 시리즈의 고고학적 증거와 삼국지까지 고려해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475년 백제에서 유례없는 한성이 함락된 후 잠시 지방 통제가 약화되어 이 무렵 억눌렸던 금강 일대의 세력이 커졌습니다. 당연히 이 시기에 마한 이후 연합군을 이끌었던 전라남도 서남부 지역의 연합군으로 흔히 일컬어지는 영산강 유역 세력도 독립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거리가 가까운 금강 분지의 세력은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초반까지 백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더욱 강력해진 영산강 분지의 세력은 더 오래 걸렸습니다. 금동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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